아비뇽 다녀온 판소리 '눈, 눈, 눈', 23∼24일 LG아트센터 서울서 공연
소품 없이 대극장 채우는 연기력 돋보여…관객 참여로 무대 완성
이미지 확대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푸르르∼히힝. 제티가 당근을 찹찹, 냠냠, 주둥이를 벌려서 와그작와그작…"
소리꾼 이자람이 맛깔난 말 흉내 연기를 곁들여 고난도 시김새(한국 전통 음악에서 주된 음의 앞이나 뒤에서 꾸며주는 장식음)를 쏟아내자 객석에서 웃음과 환호가 동시에 터졌다.
어떤 무대 배경도, 소품도, 의상도 없이 홀로 1천300여명의 관객을 머나먼 러시아의 눈보라 치는 벌판 속으로 끌어들인 그는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재담가이며 가수였다.
지난 23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상연된 이자람의 '눈, 눈, 눈'은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을 원작으로 한 창작 판소리다. 지난해 365석 규모의 LG아트센터 서울 유플러스(U+) 스테이지에서 초연됐다.
올해 7월엔 세계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축제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돼 현지에서도 호평받았다.
이번 공연은 LG아트센터 서울로 돌아와 초연보다 더 넓어진 1천335석 규모의 대극장 무대에서 펼쳐졌다.
이미지 확대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프랑스에 갔다가 뉴스에 나오니 동네 주민들이 절 알아보신다"며 객석의 긴장을 풀고 웃음을 자아낸 이자람은 검은색 한복을 입고, 흰 부채 하나만을 쥔 채 아무런 장치 없는 무대에서 고수 이준형과 눈 내리는 1800년대 러시아의 농촌 마을로 관객을 데려갔다.
작품은 러시아의 상인 '바실리'와 일꾼 '니키타', 종마 '제티'를 중심으로 이들이 바실리의 거래를 위해 이웃 마을 고랴츠키노까지 가는 여정을 그린다.
분위기 형성과 줄거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눈을 묘사하며 여러 등장인물, 서술자, 동물을 넘나드는 이자람의 연기력이 돋보였다.
눈 쌓인 배경도, 인공 눈도 없는 무대에서 이자람은 입으로 '쉿' 소리를 내 눈보라 섞인 바람을 표현했으며 두껍게 쌓인 눈을 헤치고 걷는 듯한 발걸음으로 설원을 표현했다. 무대 바닥과 허공에는 때때로 안개가 깔려 연출을 도왔다.
능청스럽게 목소리를 바꾸며 연기하는 다양한 인물과 우스우면서도 실감 나는 말 연기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돋보였다.
이자람은 프로그램북을 통해 "작품을 위해 몽골의 설원을 여행하며 눈보라를 느끼고 승마를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 공연의 품질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소리다. 거의 숨을 쉬지 않는 듯 호흡을 조절하며 몰아치는 노래와 대극장을 가득 메우는 칼칼한 음색, 자유자재로 꺾는 가락이 감탄을 자아냈다.
고수 이준형은 분위기에 따라 때로는 잦아들거나 때로는 휘몰아치는 장단으로 흥을 돋웠으며 소리꾼의 노래와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북소리로 호흡을 자랑했다.
이미지 확대
[LG아트센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무엇보다 이날 이자람의 무대는 '판소리는 지루하고 졸리다'라는 편견을 깨며 판소리의 본질인 현장성과 참여적 성격을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흔히들 판소리는 창자(唱者), 고수(鼓手) 그리고 관객이 함께 완성하는 공연예술이라고 한다. 판소리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의 자료에 따르면 판소리는 본래 광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청중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되는 공연이다.
이날 작품을 시작하기 전 가볍게 관객과 소통하며 '판 벌일' 준비를 한 이자람은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 여러분이 '삼합'을 이루는 공연"이라며 관객과 '얼씨구', '좋다' 등의 추임새를 연습했다.
단순히 추임새만 넣는다고 공연의 현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자람은 노래와 연기, 적절히 곁들인 작품 설명과 때때로 객석에 건넨 농담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
일례로 니키타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 마을에 들러 마을 사람이 권유하는 술을 마실까 말까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침을 꼴깍 삼키며 고민하는 인물을 익살스레 표현했는데 결국 술을 마다한 니키타의 모습에 객석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평범한 장면에서도 전체 관객이 집중하고 적극 호응하며 공연에 참여하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이자람의 힘이다.
이자람 본인이 직접 창작한 판소리인 덕에, 소리꾼이 깊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대본에 맞추지 않고 자유자재로 즉흥 연기와 노래를 곁들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창의성을 살리고 보는 재미를 더했던 점이었다.
관객과 함께하는 우리 소리 '눈, 눈, 눈'은 24일 하루 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된다.
fat@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24일 16시02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권지현
At a glance
- Topic
- World
- Country
- 🇰🇷 KR
- Publisher language
- KO
- Added to Alln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