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세계에 투영한 현대의 자화상…'웅녀'로 연출한 대지의 여신
성악진·오케스트라에 관객 열광…바그너 대본의 현대적 해석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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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의 국내 초연작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연출한 로렌초 피오로니가 29일 저녁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오페라단의 '라인의 황금'으로 다시 한번 경이로운 오페라 연출의 최고봉을 선보였다.
'라인의 황금'을 포함해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창작한 바그너는 북유럽·게르만 신화에서 이야기의 토대를 가져왔지만,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 산업화 시대의 현실을 드러낼 수단으로 그 신화를 가공해 사용했다. 그러므로 피오로니의 방식처럼 바그너 작품에서 신화의 세계를 지우고 우리 시대 사회 현실을 드러내는 것 역시 타당한 선택이다.
최고의 신 보탄과 그의 조력자인 책략의 신 로게가 황금과 반지를 탈취하러 니벨룽 족 알베리히의 지하 세계 '니벨하임'으로 내려갈 때 강렬한 음악과 함께 거대한 영상이 서서히 무대를 채우며 다가온다. 그리고 영상 속의 무수한 검은 기둥들은 곧 불빛으로 가득한 대도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관객들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니벨하임이었구나'라고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자본이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사랑을 포기하고 얻은 반지의 힘으로 니벨룽 족을 노예처럼 부릴 뿐 아니라 요술투구의 '투명인간' 기술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들을 감시하는 알베리히의 모습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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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라인 처녀들의 장신구들을 빼앗으려고 그들을 살해하고 시신에서 금니까지 뽑아낸 알베리히가 가해자이자 피해자, 착취자이자 피착취자임을 다각적으로 드러낸 장면들이 설득력 있게 표현됐다. 또 보탄에게 반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지의 여신 에르다를 단군신화의 '웅녀'로 연출한 아이디어는 일반적인 에르다 장면의 장엄함을 포기했음에도 기발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현대세계의 보편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무대와 의상과 영상에 한국 특유의 요소들을 도입한 부분들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상하로 구분된 2층 무대 및 회전무대를 역동적으로 변환시킨 파울 촐러의 무대디자인 덕분에 인터미션(중간 휴식) 없는 150분의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은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었다. 의상디자이너 카타리나 골트의 세련된 색감, 스타일이 살아있는 현대적 의상디자인 역시 무대 집중도를 높였다. 무대 양쪽 스크린에 실시간 라이브 카메라 영상 또는 녹화된 영상을 투사해 무대 이면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상황 이해를 돕는 방식도 효과적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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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고난도의 현대오페라 '죽음의 도시'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지휘자 로타 쾨닉스는 이번에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최선의 사운드를 끌어냈다. 원작의 하프 6대 편성은 오페라극장 피트 사정상 2대로 축소되었고 호른의 수도 줄였지만, 76명 오케스트라로도 음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쾨닉스는 라인강의 시원(始原)을 묘사하는 첫 '내림마' 음으로부터 점점 화음이 불어나는 어려운 전주곡을 세심하고 치밀하게 이끌었다. 니벨룽들이 모루를 두드리는 충격적인 리듬, 신들이 발할로 입성하는 피날레의 장엄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오케스트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실수가 잦지 않고 완성도가 높은 관현악 덕분에 관객은 어려움 없이 분량이 많은 성악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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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도 나무랄 데도 거의 없었던 탁월한 성악진 역시 첫 공연의 성공을 견인했다. 보탄 역의 베이스바리톤 올렉산드르 푸슈냐크, 알베리히 역의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 로게 역의 테너 조너선 스토턴은 마치 그 인물 자신인 듯한 탁월한 연기와 자연스러운 가창으로 관객의 시선을 고정했고, 프리카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프라이아 역의 소프라노 다니엘라 쾰러, 파졸트 역의 베이스바리톤 류지상 역시 배역에 정확히 어울리는 음색과 연기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외의 조역가수들 모두 최고의 가창과 연기로 무대 완성도를 끌어올렸고, 신진 성악가들로 구성된 국립오페라스튜디오합창단, 아트컴퍼니 하눌의 연기자들도 최선의 힘을 보탰다.
연출가는 피날레 장면을 라인 처녀들의 장례식으로 설정해 우리 사회 권력과 자본이 지닌 폭력성과 이중적 행태에 교묘하고도 강렬한 편치를 날렸다. 바그너 대본의 섬세한 현대적 해석으로 성별 갈등과 환경 문제까지 매혹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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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ina0314@naver.com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30일 13시39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임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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