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희

서울시극단 '에너미' 개막…고전 '민중의 적' 현대적 재해석

하루 만에 영웅서 '공공의 적'으로…댓글 폭력과 인간의 고립감 그려

이미지 확대 서울시극단 '에너미' 공연 장면

서울시극단 '에너미' 공연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우리 동네엔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뭐라도 쥐여주면 당장 기분 좋아지고, 그래서 어떤 거짓말이라도 기꺼이 믿어주는 한심한 존재들."

무대 위 인물이 격앙된 목소리로 대중을 꾸짖자, 그를 향해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이 순간 멈칫한다. 진실을 밝히려다 순식간에 지역사회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인물의 외침에 객석은 서늘해진다.

서울시극단의 연극 '에너미'(The Enemy)가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작품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고전 '민중의 적'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키어런 헐리의 대본을 바탕으로, 강훈구 작가의 윤색과 이준우 서울시극단 단장의 연출을 거쳐 무대에 올려졌다.

140여 년 전 입센이 던졌던 민주주의와 여론의 취약성에 대한 질문을 오늘날의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문화 위에 날카롭게 겹쳐 놓는다.

원작의 뼈대를 따르지만, 인물 설정과 매체 환경은 현대에 맞춰 과감하게 변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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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원작의 형제 갈등은 자매의 대립으로 탈바꿈했다.

활동가 출신으로 워터파크 리조트 '빅 스플래쉬'의 창립 이사이자 공중보건 담당자가 된 커스틴(문소리 분)은 리조트 개장 직전 수돗물이 독성 물질에 오염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공론화하려 한다.

그러나 '재생 혁신 도시' 유치와 지역 경제 부흥에 사활을 건 커스틴의 언니이자 시장 보니(황영희)와 충돌하면서 진실과 여론의 치열한 대립이 시작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자매의 갈등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공공의 안전과 신념을 지키려는 커스틴과 지역 주민들의 생계 및 경제적 파급효과를 외면할 수 없는 시장 보니의 명분은 팽팽하게 맞서며 관객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이번 연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무대 스크린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장치다.

극이 진행되는 도중 유튜버 앨리(이강욱)가 무대 위에서 직접 카메라를 들고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유튜버의 멘트와 함께 화면 한쪽을 실시간 채팅창과 SNS 댓글이 채워나간다.

사실이 채 검증되기도 전에 집단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은 디지털 매체에 유독 빠르게 반응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직관적으로 시각화한다.

특히 하루 만에 '마을을 되살린 영웅'에서 '모두의 적'으로 추락하는 커스틴을 향한 온라인상의 모욕과 폭력은 무대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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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커스틴이 자신의 SNS에 진실을 공개하고 워터파크 개장행사에서 폭로를 이어 나가자, 전광판에는 "적은 너야", "사과해", "최악이다 진짜"부터 입에 담기 힘든 욕설까지 무차별적인 문구들이 비수처럼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문자는 한 개인을 끌어내리는 대중의 잔인함을 드러낸다.

현장감을 극대화한 연출 방식 역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다.

리조트 개장 행사 장면에서 시장과 커스틴이 관객을 향해 연설을 펼치고 박수를 유도할 때, 객석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 행사장의 일원이자 여론을 형성하는 '주민'이 된다.

이는 무대 위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누구나 언제든 겪을 수 있고 참여하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임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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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단 24시간 만에 열렬한 환호에서 공격 대상으로 전락하는 인간의 모습은 진실보다 여론이, 뉴스보다 댓글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오늘날의 씁쓸한 모습을 반영한다.

미디어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고전이 가진 묵직한 주제 의식을 한층 더 현실적으로 전달한다. 진실을 직시하기보다 눈앞의 이익과 자극적인 프레임에 흔들리는 다중의 모습 속에서, 연극은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묻는다.

공연은 다음 달 14일까지 이어진다.

yunnie@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27일 16시20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조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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