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현

5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내한공연…2022년 밴클라이번 결선 소환

한층 깊어진 감정, 섬세한 조화…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연주

이미지 확대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마린 올솝,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마린 올솝,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ArtsCenterIncheon/Shin-joong Kim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4년 전과 비슷한, 소매에 붉은 끝단이 달린 검정 재킷을 입은 지휘자가 등장했다. 피아니스트도 그때처럼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피아니스트가 망설임 없이 첫 음을 쳤다.

5일 아트센터인천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에서는 차세대 거장의 탄생을 예고했던 2022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을 다시 그린 듯한 무대가 펼쳐졌다.

당시 결선에서 밴 클라이번과 호로비츠 등 전설적 피아니스트들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으며 극적인 우승을 만들어 낸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지휘자 마린 올솝이 다시 만난 것이다.

임윤찬은 당시 극악의 기교와 난해한 표현으로 '악마의 협주곡'이라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그는 18세 나이에 밴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썼다.

그가 보여준 폭발적이면서도 순수한 음악성에 포디움 위에서 눈물을 훔쳤던 지휘자가 마린 올솝이다. 올솝은 해당 연주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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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마린 올솝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 무대는 콩쿠르 우승 이후 임윤찬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다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는 자리였다. 임윤찬은 4년 전보다 여유롭고 더 생생해진 감정 표현과 함께,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연주를 선사했다.

콩쿠르 때와 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임윤찬은 차분하게 도입부의 유명한 단조 선율을 연주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 선율은 곡 전체의 정서를 상징하는 부분이다.

많은 이들의 찬사를 불러일으킨 1악장 카덴차(협주곡에서의 무반주 독주)에서는 더 유려해진 흐름과 강약 조절에 의한 풍부한 감정이 돋보였다.

이 구간의 카덴차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섬세하며 유연한 음색의 오리지널 버전과 화음 위주의 묵직한 또 다른 버전으로 나뉜다. 임윤찬은 밴 클라이번 콩쿠르 때와 같이 가벼운 질감의 오리지널 버전 카덴차를 연주했지만, 표현은 완전히 달랐다.

특유의 정확한 타건과 음 처리는 여전했지만, 콩쿠르에서는 절제미가 돋보였던 반면 이날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음표와 드라마틱한 세기 조절로 청중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감정에 몰입한 듯 중간중간 찌푸리는 미간과 제스처 또한 그의 성숙한 음악성을 드러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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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CenterIncheon/Shin-joong Kim

2악장에서는 오케스트라에 녹아드는 피아노의 음색이 돋보였다. 피아노 없이 시작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고 악단 쪽으로 몸을 돌린 임윤찬은 리듬을 타듯 몸을 흔들다가 몽환적이고 애수 어린 오케스트라 선율에 합류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그였지만 솔로 피아노가 등장하지 않는 구간의 부드럽고 조용한 선율에서는 두드러지지 않고 오케스트라의 수채화처럼 번지는 음색을 받쳐 주는 연주를 선보였다.

'비르투오소를 위한 찬가'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장대한 추진력과 힘, 압도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3악장은 그야말로 임윤찬을 위한 악장이었다.

그는 관악기와 함께 정적과 같이 여린 음을 들려준 다음 오케스트라와 웅장한 음계를 달리는 듯한 클라이맥스를 보여줬다. 다만 3악장 또한 독주자의 기교만을 과시한다기보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느낌이었다.

타악기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청중을 몰아가는 가운데 4년 전보다 더 자유로워진 화음을 쏟아낸 임윤찬은 환희에 찬 감정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마찬가지로 격정으로 끝맺은 지휘자가 4년 전과 같이 포디움 위에서 임윤찬의 어깨를 감쌌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기립박수가 쏟아진 후 임윤찬과 오케스트라는 앙코르곡으로는 이례적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3악장 코다(악장의 끝부분 악구)를 재차 연주했다. 임윤찬의 상징으로 남은 작품의 공연을 기다려왔던 국내 팬들에게 선사하는 앙코르이자 전설의 순간을 기리는 연주였다.

임윤찬과 여러 차례 연주를 함께했으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를 맡은 올솝의 지휘는 독주자와 악단의 하모니를 잘 살렸다.

피아노와 내려치듯 활을 긋는 천둥 같은 현악기가 주고받는 대화는 정확한 박자와 합이 돋보였는데, 이는 독주자와 악단 모두의 소리를 경청하고 조율한 지휘자의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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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CenterIncheon/Shin-joong Kim

피아노 협주곡에 이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바버의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작곡가 바버와 그의 교향곡은 올솝이 오랜 시간 여러 악단과 협업하며 연주했으며 앨범에도 수록한 곡이다. 올솝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작품 속 모든 제스처에 감정 표현이 응축돼 있고 불필요한 것은 전혀 없다"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절제미를 발견하게 되는 곡"이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대로 작품은 웅장했으나 올솝이 지휘와 악단의 연주는 과장된 감정 없이 간결한 느낌이었다.

치밀하고 침착한 지휘 아래, 능숙하게 음향을 조절해 압도감을 준 현악기와 우레와 같은 관악기 소리가 웅장했다. 잠깐의 정적 속 목가적인 클라리넷 선율과 하프의 꿈 같은 소리는 감정의 풍경을 다채롭게 그려냈다.

이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로 또다시 기립박수를 받은 악단은 포디움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긴장이 풀린 듯 살짝 뛰어오른 지휘자와 앙코르곡으로 드보르자크 슬라브 무곡,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선보이며 무대를 마무리했다.

fat@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1월06일 00시35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권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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