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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근 제작 AI 이미지 ]
술 한 독이 익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쌀을 쪄서 누룩과 버무려 독에 앉힌 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석 달 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 술이다. 정월 첫 돼지날(亥日)에 빚기 시작해 돼지날마다 덧술을 하는 삼해주(三亥酒)는 익는 데 100일 넘게 걸려 '백일주'로도 불렸다.
그런데 옛 조리서에는 아침에 빚어 저녁에 마셨다는 술도 나온다. 이름부터 하루를 뜻하는 '일일주'(一日酒)다.
사흘을 이름에 담은 '삼일주'(三日酒), 이레를 뜻하는 '칠일주'(七日酒)도 있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빚어 마시는 술을 '속성주'(速成酒)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일주를 열흘 안에 빚어 마시는 '순내양조주'(旬內釀造酒)의 하나로 분류한다. 조선시대 사람은 어떻게 술 익는 시간을 줄였을까.
실마리는 옛 조리서에 남아 있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은 경북 안동의 선비 김유(1491~1555)가 1540년 무렵 엮고 손자 김령(1577~1641)이 내용을 보탠 조리서다. 121가지 조리법 가운데 술 빚는 법이 59가지로 절반 가까이 된다. 2021년 국가 보물로 지정됐다.
이 책에 일일주 빚는 법이 나온다. 물 세 말에 누룩 두 되와 좋은 술 한 사발을 섞어 항아리에 넣는다. 멥쌀 한 말을 푹 쪄서 김이 빠지기 전에 넣고, 젓지 않은 채 따뜻한 곳에 둔다.
제조법 끝에는 '조양석숙 석양조숙'(朝釀夕熟 夕釀朝熟)이라는 구절이 붙어 있다. 아침에 빚으면 저녁에 익고, 저녁에 빚으면 아침에 익는다는 뜻이다. 반나절 남짓이면 마실 수 있다는 얘기다.
눈여겨볼 재료는 '좋은 술 한 사발'이다. 쌀과 누룩만 넣고 기다리지 않고 이미 빚어 둔 술을 보탰다. 농촌진흥청은 이렇게 넣은 술이 밑술 구실을 해 발효를 앞당긴다고 설명한다. 잘 익은 술에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효모가 가득하다.
처음부터 효모를 넉넉히 넣으면 발효가 곧바로 시작되고 잡균이 자리 잡을 틈도 줄어든다. 빵을 부풀릴 때 묵은 반죽을 한 덩이 떼어 넣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일주는 '음식디미방'(1670년 경), '증보산림경제'(1766), '규합총서'(1809)에도 실렸다. 경북 영양 두들마을의 정부인 안동 장씨(장계향)가 한글로 쓴 '음식디미방'의 일일주는 누룩·술·물·쌀의 양이 '수운잡방'과 같다. 한 세기 넘는 시차를 두고 같은 배합이 경북 북부 양반가에 전해진 셈이다.
'증보산림경제'는 영조 때 의관 유중림이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고치고 늘려 엮은 생활백과다. 여기에는 찹쌀죽에 누룩을 넣고 저은 뒤 6~7시간 지나 거품이 일면 항아리를 덮어 따뜻한 온돌에 두는 방법이 나온다. 이 방법에는 미리 빚은 술이 들어가지 않는다.
정말 하루 만에 술이 될까.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은 조선시대 조리서 7종에 실린 전통주 29종, 140여 가지 제조법을 정리한 '풀어쓴 고문헌 전통주 제조법'을 펴냈다. 문헌에 적힌 대로 술을 빚어 알코올 도수 등을 분석한 결과도 함께 담았다.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의 방법으로 빚은 일일주는 알코올 도수가 5.1%였다. 흔히 6% 안팎인 시판 막걸리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증보산림경제'의 방법으로 빚은 술은 0.2%에 그쳤다.
현행 주세법은 알코올 1도 이상인 음료를 주류로 규정하니, 오늘날 기준으로는 술로 치기 어려운 수치다. 같은 이름이라도 제조법에 따라 결과가 크게 갈렸다.
하루보다 조금 더 기다리는 술이 삼일주다. '산가요록'(山家要錄)에는 삼일주와 여름철에 빚는 하절삼일주(夏節三日酒)가 함께 실려 있다. '산가요록'은 세종~세조 때 어의(御醫) 전순의가 1450년 무렵 엮은 농서이자 조리서로, 현존하는 우리 조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2001년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 조리서의 역사를 '수운잡방'보다 한 세기 가까이 앞당겼다. 술 빚는 법만 60가지가 넘는다.
삼일주는 먼저 물에 누룩을 섞어 항아리에 넣는다. 이튿날 멥쌀가루로 죽을 쑤어 식힌 뒤 누룩물과 섞고, 그때부터 사흘을 기다린다. 누룩 물을 안친 날까지 치면 실제로는 나흘가량 걸린다.
하절삼일주는 누룩을 물에 하룻밤 담갔다가 고운 주머니로 걸러 찌꺼기를 뺀다. 여기에 푹 찐 멥쌀가루를 식혀 섞는다. 일반 삼일주에 없는 누룩 거르기 과정이 더해진 것이다. 여름은 기온이 높아 발효가 빠른 대신 술이 쉽게 시어지는 계절이다. 옛사람들이 여름 술 빚는 법을 따로 적어 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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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제공]
농촌진흥청이 재현한 '산가요록'의 삼일주는 알코올 도수 1.0%, 하절삼일주는 7.7%였다. 같은 책에 실린 삼일주끼리도 도수가 7배 넘게 차이가 났다. 연구진은 두 술 모두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지고 뒷맛이 깔끔하다고 평가했다. 농촌진흥청은 2008년 우리 옛술 복원에 나서면서 삼일주를 황금주와 함께 첫 대상으로 되살렸다.
칠일주는 제조법이 더 다양하다. '산가요록'과 '음식디미방', '증보산림경제' 등에 실렸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멥쌀가루로 죽을 쑤고 누룩을 넣어 밑술을 만든다. 사흘 뒤 찹쌀을 쪄서 덧술로 더하고 다시 이레를 기다린다. 밑술에 덧술을 한 번 더하는 이양주(二釀酒) 방식으로, 처음 빚은 날부터 치면 열흘이 걸린다. 이름 속 숫자가 늘 전체 제조 기간을 뜻하지는 않았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처음 빚은 날부터 이레 만에 마시는 칠일주가 실려 있다. 그중 한 방법은 첫날 밑술을 만들고 이튿날 찹쌀밥을 더한다. 술독을 이불과 옷으로 감싸 따뜻한 방에 두었다가 나흘이나 닷새 뒤 서늘한 곳으로 옮겨, 모두 7일 만에 마신다. 초반에는 온기로 발효를 끌어올리고, 후반에는 서늘한 곳에서 발효를 누그러뜨려 술이 시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농촌진흥청이 재현한 칠일주도 문헌에 따라 달랐다. '산가요록'의 한 제조법으로 빚은 술에서는 은은한 과일 향이 났고, '음식디미방'의 한 제조법으로 빚은 술은 단맛이 강했다. 빨리 빚는 술이라도 맛과 향은 저마다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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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아원 제공]
옛사람들은 왜 이렇게 서둘러 술을 빚었을까. 조선의 양반가에서 술은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에 빠질 수 없었다. 집마다 술을 빚었고, 이를 '가양주'(家釀酒)라 불렀다. 넉넉히 빚어 두면 좋겠지만 탁한 술은 오래 두기 어려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일일주는 빨리 익혀 바로 마실 수 있으나 오래 두고 먹지는 못한다고 적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삼일주 같은 속성주를 며칠 뒤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는 등 술이 급하게 필요할 때 빚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이런 술을 실제로 얼마나 자주 빚었는지까지는 알기 어렵다.
술을 빨리 익히는 방법도 여러 갈래였다. 이미 익은 술을 보태 효모를 늘렸고, 누룩물을 미리 내 두었고, 따뜻한 온돌에 독을 앉혔다. 때로는 술독을 서늘한 곳으로 옮겨 발효 속도를 늦췄다. 시간을 줄이면서도 술이 상하지 않도록 재료와 온도를 함께 다뤘다.
이런 가양주 전통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무너졌다. 통감부가 1909년 주세법을 시행했고, 조선총독부는 1916년 주세령으로 술 빚기에 면허제를 도입했다. 집에서 마실 술에도 무거운 세금이 붙으면서 1918년 37만5천여 곳이던 가양주 제조 면허는 1932년 단 1곳으로 줄었다. 1934년에는 자가용 면허 제도마저 없어졌다. 광복 뒤에도 밀주 단속은 이어졌고, 집에서 마실 술을 빚는 일은 1995년에 와서야 다시 허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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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8일 충남 예산군 한국전통주연구소에 전시된 전국의 가양주. 2026.6.8
kane@yna.co.kr
오늘날에도 짧은 시간에 술을 빚는 방법은 이어지고 있다. 집에서 막걸리를 만드는 밀키트도 여럿 나와 있다. 쌀과 누룩을 쓰는 전통 방식부터 분말에 물만 부어 발효시키는 간편한 방식까지 다양하다. 일부 분말형 제품은 상온에서 24시간 발효하면 막걸리가 완성된다고 안내한다. 조선의 일일주와 만드는 법은 다르지만, 술을 빨리 빚으려는 생각은 닮았다.
아침에 빚어 저녁에 마셨다는 일일주, 사흘을 이름에 담은 삼일주, 이레를 담은 칠일주. 옛사람들은 오래 묵힌 술만큼이나 급할 때 빨리 빚는 술의 방법도 꼼꼼히 적어 남겼다. 필요한 때에 맞춰 술을 익히는 것 역시 그들이 쌓아 온 술 빚는 지혜였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0월28일 09시20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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