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

산업계 십시일반 덕에 설립된 화학연…'성과는 모두 전수하라' 모토로 기업에 무상 이전

접착제·연료 첨가제 등 두루 사용 폴리부텐은 '대한민국 100대 기술'

아시아 최초 에이즈 치료 신약 독자 개발…제초제도 미국 시장에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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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연 자료사진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대전=연합뉴스) 김준호 기자 = "'성과는 모두 전수하라'던 설립 정신 그대로 기술 이전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기술료나 인센티브를 받는 분위기는 1990년대에나 자리 잡았으니 시대를 앞선 무상 나눔이었던 셈입니다."(한국화학연구원 관계자)

빨래를 삶지 않아도 삶은 듯 하얗게 만들어 준 표백제, 자동차 엔진을 오래 지켜 준 첨가제 등 무심코 써온 생활 속 발명들 뒤에는 국내 136개 화학기업과 정부가 힘을 합쳐 세운 연구원이 있다.

1일 한국화학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최초의 화학 전문 연구기관이 내디딘 첫걸음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1976년 9월 서울 동숭동의 작은 임시사무소에서 단 18명으로 문을 열었다.

설립 방식부터 남달랐다. 전액 국고로 세워진 다른 정부 출연연구원과 달리 화학연은 136개 화학기업이 십시일반 모은 출연금에 정부의 출자까지 더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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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연 착공식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산업계가 스스로 '우리에게도 화학 연구소가 필요하다'며 지갑을 연 국내 유일의 민간 주도 연구원이라고 화학연 측은 설명했다.

출발점이 이렇다 보니 '연구성과는 값을 매기지 말고 산업계에 모두 전수하라'는 당시 화학연의 방침이 여기서 나왔다.

초기 화학연의 대표적인 발명품은 '빨래 끝∼'으로 기억되는 산소계 표백제다.

채영복 전 소장은 "1979년 동양화학 이회림 회장이 화학연을 찾아 '소다회와 과산화수소가 공장에서 넘쳐나니 이 둘로 뭔가 만들 수 없겠냐'고 요청하며 연구비로 2천600만원을 제시했다"면서 "현재 가치로 5억∼10억원에 맞먹는 파격이었다"고 회상했다.

화학연은 독자 공정으로 이듬해 1월 한국형 표백제를 완성했는데, 삶지 않아도 삶은 효과를 내는 '발생기 산소'의 원리를 적용했다.

환경오염 물질인 붕소를 쓰지 않은 점도 앞섰다.

이 기술은 1984년 '옥시크린'이라는 상품으로 세상에 나와 수십 년째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번 빨래를 삶느라 고단하던 주부들의 부엌 풍경을 바꿔 놓은 발명으로 인정받았다.

화학연은 이 기술을 동양화학에 넘기며 이전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성과는 모두 전수하라"던 설립 정신 그대로였다.

훗날 이 회장은 대덕특구 스포츠센터에 수영장 건립 기금을 선뜻 기탁하는 것으로 그 빚을 갚았다고 화학연 측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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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소재 연구본부 소속 연구 현장 모습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위기도 있었다. 1987년 물질특허 제도가 도입되자 선진국 제품을 모방해 값싸게 공급하던 관행에 급제동이 걸렸다.

채 전 소장은 "막 뜨려던 화학산업을 물질특허라는 모래가 가라앉게 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위기감이 돌았지만, 화학연은 이를 '스스로 만드는 화학'으로 방향을 트는 계기로 삼았다.

그 대표작이 폴리부텐이다.

접착제·윤활유·연료 첨가제에 두루 쓰이는 이 소재를 한국은 오랫동안 전량 수입해 해마다 800만 달러어치를 사들여야 했다.

화학연은 10여년의 연구 끝에 1994년 독자 생산기술을 완성해 대림산업에 이전했고, 결국 전량 수입하던 폴리부텐은 국산으로 대체됐다.

이 성과는 한국공학한림원의 '대한민국 100대 기술'에 오른 데 이어 지난해 국립중앙과학관이 화학 원료 국산화를 이끈 자료로 꼽아 '국가 중요 과학기술자료'로도 등재했다.

화학연의 최대 성과로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치료제 개발을 꼽을 수 있다.

1995년부터 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 연구를 시작한 손종찬·이일영 박사팀은 2006년 미국 글로벌 제약사인 길리어드(Gilead Science)와 공동연구 후 2008년 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 후보물질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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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치료제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기술을 이전받은 기업 카이노스메드는 에이즈 환자 증가율이 높은 중국 내 상용화를 위해 2014년 중국 제약사 장수아이디에 후보물질의 중국 판권을 넘겼다.

이후 중국 내에서 임상 1∼3상을 거쳐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의 판매 허가를 받았고, 치료제가 판매되고 있다.

아시아에서 에이즈 치료 신약을 독자 개발해 시판한 사례는 최초라고 화학연은 강조했다.

화학연에서 개발한 신약 후보 물질 가운데 처음으로 상용화된 신약이기도 하다.

화학연이 개발한 제초제도 해외에 진출했다.

고영관 박사팀이 국내 기업 팜한농과 공동 개발한 비선택성 제초제 '테라도'는 영국 등에서 진행된 150여 개 항목의 까다로운 안전성 시험에서 사람·동물·환경 모두에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약효 속도는 기존 제품들보다 최대 10배가 빠르다고 화학연 측은 설명했다.

2018년 출시된 테라도는 28개국 이상에 특허를 등록한 데 이어 2020년 제초제 시장 최고의 무대인 미국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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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학연구원 현판식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화학연은 기업부설 연구소 육성사업을 통해 2016년 최초의 육성(졸업)기업을 배출하는 등 기업 지원·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13년부터 시작된 디딤돌 사업 졸업 기업은 43종의 제품화 추진, 388억원의 제품 매출액 발생, 연구개발 인력 282명 고용, 특허 128건, 화학연 기술이전 66건, 투자 유치 588억원 등 다양한 사업화 성과를 거뒀다.

18명으로 시작한 화학연은 대전 본원과 울산·여수 거점에서 1천600여 명이 일하는 국내 유일의 화학 전문 연구원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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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학연구원 전경

[한국화학연구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올해로 창립 50년을 맞은 화학연은 9월에 '2040 비전'을 선포하면서 '세상이 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화학으로 답한다'는 슬로건을 공개했다.

신석민 화학연 원장은 "반세기 동안 우리 연구원은 대한민국 화학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가·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며 "화학 기술 전문 글로벌 최고 연구 기관으로 도약해 불확실한 미래의 어둠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겠다"고 말했다.

kjunh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11월01일 07시00분 송고

Source: Yonhap Korean · 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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